듀오






발렌타인데이를 한 달 앞둔 2001년 1월 14일 오후.
학교를 대구에서 나오긴 했지만 지리에는 서툴렀기
에 약속시간 보다 20분 일찍 만남장소에 도착했다.
화장실에 들러 얼굴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어디 앉을까 두리번거리며 좋은 자리를 찾는데 울리는 전화.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인데요, 잘 오고 계십니까?"
자기는 조금 일찍 커피숍에 와 있는데, 천천히 조심해서 오라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받으면서 나의 만남 상대를 찾을 수 있었고, 자리에 앉으며 "이 사람 참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여유롭고, 순조로웠다.



"같은 일을 하시니까 대화가 잘 통할 거예요."

커플매니저가 만남 상대를 소개할 때 한 말이었다. 남자분도 회사에서 QC(품질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회의 자리도 아니고, 일 얘기를 하면 얼마나 하겠냐 싶었다.
헌데 대화를 하다 보니 커플매니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업무 특성상 QC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동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회사 브랜드 이미지를 정확히 인지해야만 업무수행을 잘 할 수 있는 분야였다.
그날 나와 만났던 길현씨는 자기 업무에 대한 자부심에 들끓고 있었다. 그 동안 일을 하면서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무척 달랐다.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방식, 동료들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노하우. 이런 것들을 통해 그 사람의 본성과 심성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를 마신 후 그날 우리가 선택한 식사 메뉴는 칼국수였다.
미팅 시에는 가능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정식을 먹는 게 좋다는 조언을 받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편안한 상대였고, 더구나 날씨도 쌀쌀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찻집에서처럼 식사 시간에도 우리는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갔는데, 식사가 끝나 갈 즈음 갑자기 길현씨의 말수가 줄었다. 조금 부끄러워 하는 것도 같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더니 대뜸 고개를 들고,
노란색 곰돌이 인형이 달린 핸드폰줄을 내밀었다.

"오늘, 좋은 분 만나면 드리려고 샀어요."
다 큰 성인 남자가, 그것도 앙증맞은 노란색 곰돌이 인형이 달린 핸드폰줄을 선물할 줄이야.
난 그만 함박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럼, 그 보답으로 제 핸드폰줄을 드릴게요."
길현씨의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예뻤는지 그리고 감동적이었는지 나는 그 자리에서 내 핸드폰줄을 다시 선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 좋은 만남을 갖고도 나는 왠지 길현씨의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집에 가는 길에 3-4번 가량 전화가 왔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결혼을 전제한 만남이라는 현실 앞에서 뒷걸음 쳐지는 느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나 퇴짜를 놓았으면 알아들었을 법도 한데. 다음 날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무심결에 받으니 그 남자, 길현씨였다.
"어제 전화를 받지 않아서 걱정 많이 했습니다.
오늘 즐거운 하루 되시고요. 이따 오후에 또 전화 하겠습니다.
전화 안 받으시면 안 됩니다. 하하하~"

" 이 남자… 뭐지?"
전화를 끊고 일을 하는데 배시시 웃음이 나면서, 그 남자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그날 오후, 나는 길현씨와 마주 앉아 있었다.

삼형제 중 막내라 결혼을 서두르는 길현씨네와는 달리 우리 집은 딸만 넷에다 위로 언니 두 명이 미혼인 상태여서 가능한 결혼을 미루려고 했다. 보수적인 부모님은 언니를 제치고 동생이 먼저 결혼할 수 없다며 길현씨를 만나는 일도 거부 하셨다.
그러는 동안 내내 길현씨는 울먹이는 나를 달래고, 위로해주며 자기는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길현씨의 마음이 닿았는지 10개월 후 드디어 부모님께서 "먼저 사진으로 보겠다"는 운을 떼셨고 2002년 4월 28일, 부모님의 축복 속에 행복한 새출발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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